독서기록

넛지와 슬러지, 퇴직연금과 줄 서기에 대하여

톨톨톨톨 2023. 7. 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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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파이널 에디션

요즘 넛지 파이널에디션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예전부터 - 다시 생각해 보면 2020년에 전 회사동료가 이 책을 선물 받았던 게 기억난다 - 여러 채널에서 많이 노출되던 책인데, 마침 서가에 있는 걸 발견하여 출판날짜를 살펴보고 열어보았다. 트렌드에 관한 책들은 너무 쉽게 그 내용이 1,2년만 지나도 그 쓸모가 없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이 넛지라는 책은 1,2년 만에 외면당할 책 같진 않았다. 단지 그 사례들이 outdated 될 순 있지만.

넛지라는 책은 사람의 심리 기저에 깔린 무언가를 최대한 긍정적으로(사실 중립적인 도구에 더 가깝다.) 이용하는 여러 도구들을 사례를 바탕으로 설명해준다. 너무나도 다양한 사례가 있어서 일일이 소개하기가 어렵지만, 나의 블로그 주제와 관련 있는 투자이야기, 즉 퇴직연금에 대해 얘기를 해보려 한다.

퇴직연금과 넛지

많은 회사들이 퇴직연금제도를 활용하고 있고, 이는 조직구성원들에게는 놓쳐서는 안되는 좋은 복지 중 하나이다. 대체로 퇴직연금을 시행하는 회사에선 확정급여형(DB) 및 확정기여형(DC)의 옵션을 제공하고 있는데, 넛지에서 소개하는 인간(일반적인 사람, 이성과 감성을 다 가지고 있으며 비이성적인 결정도 서슴지 않는 존재. 반대의 개념으로 반드시 이성적인 판단만을 하는 사람을 이콘이라고 정의한다.)들은 대체로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 후 쳐다보지도 않는 특성이 있다.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확정급여형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결코 옳은 선택이라 보기는 어렵다. 확정기여형에도 손실을 거의 0%까지 제한할 수 있는 여러 상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금리연동형 등을 가입하면 굉장히 보수적인 수익률을 주지만 적어도 손실은 없다. 소위 시장금리라 부르는 금리를 제공하여 전반적으로 그 수익이 미미할 뿐, 반드시 수익은 수익이다.

문제는, 이런 확정기여형을 선택한 사람들조차 첫 디폴트 옵션을 선택하지 않고 금액을 묵혀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확정급여형과 차이가 없게끔 아무런 상품 선택 없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단 얘긴데, 올해엔 정부차원에서도 그러한 불이익(투자하지 않는 데 따른 기회비용이라고 할 수 있다.)이 발생하지 않게끔 퇴직연금 운용사마다 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 옵션)를 도입했다. 이번에 우리 회사도 이 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설명회를 한 번 진행했는데, 골자는 매달 지급되는 퇴직금(급여의 일부)이 놀지 않고 운용될 수 있게끔 사전에 상품을 선택하게끔 일종의 강제를 하는 제도이다. 

다른 의도가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내가 보기에는 정부 차원에서 퇴직연금의 수익자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이익을 제공받을 권리를 보장해주는 넛지라고 생각한다. 즉, 디폴트 옵션 자체를 의무 선택으로 바꿔버려서 수익이 나게끔 권장 및 장려하는 정책인 것이다. 기존의 제도를 바꾼다는 점에서 약간의 반발심, 경각심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너무 경계하지 말자. 적어도 내가 보기엔 가입자들의 이익을 장려하는 제도로 보인다.

우리 회사 직원 중 30대 직원들의 퇴직 연금 운용 현황

퇴직연금과 같은 경우는 더 할 얘기가 없기도 하지만, 다른 직원들이랑 투자에 관한 얘기를 할 기회는 사실 많지 않았는데 마침 삼성생명에선 이런 그래프를 제공해주는 것을 발견.

본인의 투자성향을 바탕으로 알맞는 것들을 옵션 중에서 골랐겠지만, 대체로 안전한 투자를 선호하고 원리금보장형을 무려 92퍼센트의 비중으로 선택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30대가 아닌 전체 가입자를 뽑아봐도 92퍼센트였고, 삼성생명의 모든 가입자들로 범위를 확대했을 때조차 88퍼센트가 원리금 보장형을 선택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 퇴직연금이 도입될 당시, 이 퇴직연금에 대해 설명을 해줬던 상담사들이 운용상품에 대해 최대한 보수적으로 고를 것을 직간접적으로 강조했는데, 이 역시 가입자들에게 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통해 본인들이 원하는 상품을 선택하게끔 하는 넛지가 잘 활용된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투자포트폴리오 - 해외주식이 다수

본인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포트폴리오를 골랐기 때문에, 해외주식이 70%, 원리금보장형이 30%다. 종종 해외주식의 성과가 좋을 때마다 총포트폴리오의 위험설정비율(70% 이상)을 넘었다는 경고 문자가 오기도 한다. 

넛지가 책에서 말하듯, 대부분의 퇴직연금(DC형) 가입자들은 한번 선택해둔 설정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위임자 유형), 심지어 본인이 직접 골라서 변경을 했던 사람들조차 그 횟수를 살펴보면 대체로 1회를 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고, 나 역시도 처음에 고른 1회 이후에 바꾼 적이 없다.

덕분에, S&P 500을 바탕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는 2022년 암흑기를 거치며 퇴직금 주제에 마이너스 두 자리까지 마이너스 수익률을 보여줬고 요즘엔 다행히 두 자릿수 수익률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내 자랑인 것 같지만 맞다. DC형 중에서 어떤 포트폴리오를 고를지 망설여진다면 반드시 미국 S&P500 지수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포트폴리오를 선택하자. 코로나와 같은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인플레이션의 터널을 거쳐오면서도 미국의 S&P는 결코 실망을 시킨 법이 없다. 1-2년 안에 손을 털고 투자를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면, 장기적인 우상향을 찾는다면, 고개를 들어 S&P500 지수를 보게 하라.

최근 5년 간 S&P 500 지수의 상승곡선

다소 뜬금없지만, 퇴직연금제도에도 여러 넛지가 녹아있다.

 

줄 서기(웨이팅)에 녹아있는 슬러지

슬러지야 말로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 중에 하나였다. 왜냐면 이 슬러지는 우리 주변에서 굉장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태라서 더 그렇다. 아주 쉬운 예로 구독취소를 어렵게 만드는 절차들이 그렇다.

예전에 미국에 잠시 있을 때 플래닛 피트니스(Planet Fitness)라는 헬스장을 다녔었다. 월간으로 구독을 하는 단위이기 때문에 매월 약 15달러가 신용카드로 자동 결제가 되었는데, 가입은 현장에서 쉽게 되었고 온라인으로도 가능했다. 다만, 미국에서 구독취소를 잊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는데, 무조건 현장방문을 하라는 조항이 있었고, 친구를 통해서 겨우 구독해지를 했던 경험이 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걸 어떻게 표현할지도 몰랐던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슬러지는 바로 줄서기이다. 본인은 헝거마케팅을 매우 혐오한다. 예전처럼 플랫폼이 없던 시대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전화도 없고, 앱도 없는데 점주가 무슨 수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들일 수 있을까. (사실 이 경우조차 화이트보드 등의 고전적인 방법을 통해 극복해 나가는 여러 식당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러 매체 - 티비든 소셜미디어든 가리지 않고 홍보되는 여러 식당 중엔 줄서기라는 슬러지(줄 선 사람들의 시간은 그 자체로도 얼마나 소중한가?)를 기꺼이 활용하는 식당들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을 줄 세우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면서 본인들의 가게를 직간접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줄 서는 식당이라는 예능이 나올까? 요즘엔 테이블링, 캐치테이블 등 체계적으로 웨이팅을 관리하면서도 손님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앱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식당들은 손님들을 줄 세움으로써 본인들의 마케팅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아주 나쁜 슬러지가 아닐 수 없다.

이를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슬러지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의 사업 기회가 되기도 한다. 줄 서기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캐치테이블, 테이블링부터 정부가 만들어둔 세금체계가 너무 복잡한 세금 환급을 쉽게 해주는 삼쩜삼이라든지 (미국에는 터보택스가 있었다. 덕분에 한큐에 세금 환급을 할 수가 있었다.)등이 전부 슬러지를 해결하는 새로운 사업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슬러지 해결사들조차 그 사업의 존속을 위해 슬러지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고 오히려 이 슬러지가 유지되도록 로비를 벌이기도 한다는 점도 경고한다.

책은 슬러지 해결 사례로 고속도로 통행 징수에 대한 사례를 제시한다. 교량을 건설할 때, 통행세 징수만을 비용 편익 분석에 포함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 통행세를 지불하려고 멈추고 기다려야 하는 운전자들의 불편 및 시간 할애를 전부 비용으로 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용 산정 이후에 결국엔 지금의 하이패스와 같은 효과적인 슬러지 제거가 이루어졌다.

 

요즘에는 집중력이 떨어져 생각나는 곳에서 멈춰 글을 쓰다가도 자꾸 방향을 잃어버리게 된다. 다행히 이 넛지라는 책은 모든 챕터를 순서대로 읽어야 이해될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실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주는 진지함이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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