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칩워(Chip War, 반도체 전쟁) 후기

톨톨톨톨 2024. 1. 2. 02:28
반응형

2023년 마지막 도서는 칩워를 골랐다. 여러 반도체 주식에 투자하고 있음에도 반도체가 어떤 건데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대답하기 어려웠던 내게 반도체를 개괄적으로 다뤄줄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책 분량이 500페이지가 넘어가기에 이 책을 다 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이틀을 투자한 끝에 2023년에 시작한 책을 2024년 초에 끝낼 수 있었다. 골방에 틀어박혀서 하루종일 책을 읽어서 약간의 우울함도 느껴지는 연휴를 보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오히려 빨리 후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칩워라는 책은 반도체 산업이 탄생한 역사의 흐름과 이 반도체를 둘러싼 지정학적 전쟁, 현대로 이어지며 진행되고 있는 공급망사슬까지 이 책보다 반도체산업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쓰인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본 리뷰의 하위 내용은 책 본문에 대한 스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치 않는다면 뒤로 돌아가기를 추천드린다. 다만, 내가 리뷰 몇 줄 끄적인다고 이 방대한 양의 책의 일부나마 묘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칩워: 교보문고

오늘날의 반도체란 무엇일까?

마치 반도체 개론, 반도체의 이해와 같은 따분한 질문일 지도 모르지만, 이 질문은 시대에 따라, 응답자에 따라 다른 답변이 나올 수 있는 질문이 될 것이다. 책에서 일부 묘사하고 있는 표현에 따르자면, "반도체는 미국이 개발한 기술을 전 세계가 함께 발전시켜서 만들어 낸 공급망의 산물이다."

미국이 개발하여 한 때에는 소련과의 군비 경쟁의 수단으로 국방자원으로 활용되던 반도체는 어느덧 민간시장이라는 거대한 수요를 만들어냈고, 이 과정에서 일본, 대만, 한국 등의 여러 국가가 큰 판에 함께 뛰어들게 되었다. 오늘날 반도체 시장은 다국적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현상을 잘 표현하고 있는 단어로 무기화된 상호의존 (weaponized interdependance)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미국과 우방국(대만, 한국, 네덜란드 등)이 행사하고 있는 반도체에 대한 영향력과 더불어 이 중 하나라도 작동하지 않을 시 전 세계가 겪게 될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책에서는 화웨이의 예를 들고 있는데,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화웨이를 여러 방면으로 억압한다. 우방국들과 함께 화웨이의 장비를 수입하지 않는 것은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다. 화웨이가 네트워크 장비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국으로부터 반도체를 구매해야 하는데, 미국은 여러가지 수단을 가지고 있다. 대만에 있는 TSMC를 통해 화웨이의 칩을 생산하지 못하게끔 압박하는 방법이 있고 (화웨이가 TSMC의 매출 2순위임에도 대만은 표면적으로 화웨이의 칩셋을 만들지 않을 것이라 수긍한 바 있다.), 화웨이가 자체적인 칩셋을 생산하지 못하게끔 ASML을 통해 노광장비 판매를 막는 등의 방법이 있는데 미국은 긴밀히 구축해 둔 여러 병목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늘 크게 다루어 왔던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해서 왜 물량전으로 승부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이 쉽게 따라오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곤 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야 이게 단순히 돈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반도체 전쟁 속 숨어 있는 이념 전쟁

사실 반도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다보니,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반도체는 기껏해야 스마트폰, PC, 데이터센터 등에 들어가는 장치에 불과했다. 그나마 코로나 때 자주 거론됐던 공급망 이슈 뉴스를 통해 자동차에 들어가는 여러 반도체에 대해 들어본 정도가 전부였지만, 군사적인 내용에 있어 반도체가 가지는 함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칩워에서 다루는 반도체의 군사적 측면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실질적인 물량의 우위를 지닌 소련을 이길 수 있는 기술력의 증강이 바로 반도체 혁명을 통해 진전되고 있었고, 베트남 전쟁 내내 미군에게 실패를 안겨주었던 유도미사일의 낮은 명중률이 반도체 업그레이드를 통해 목표 지점 정밀 타격을 가능하게 했다. 겉으로 공표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조용한 승리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비용 효율을 위해 더 낮은 인건비를 찾다 안착한 말레이시아, 대만, 한국 및 일본이 반도체의 등장과 더불어 경제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부분 역시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발견이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우방국 내에서 인건비가 낮은 나라를 찾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후에는 이 우방국들이 반도체 생산의 거점이 되어 공산주의의 대표진영인 중국에 맞서 산업적인 관점 하에 미국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반도체 생산 시설의 오프쇼어링이 가난한 우방국들의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계산이 있었다는 게 더 기가 막히는 사실이었다. 대만의 경우, 이러한 사실을 적극 활용하여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니 정말 대만을 다시 봤다.

 

이 책을 누가 보면 좋을까?

삼성전자 주주들

바야흐로 삼성전자가 국민주식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만큼 한국의 많은 이들이 삼성전자의 주식을 최소 1주씩 보유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삼성이라는 나라가 한국의 GDP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10%라는데 비해 삼성의 반도체 역사를 아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책은 삼성의 역사를 다루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반도체의 발전과 함께 삼성의 반도체는 어떤 식으로 성장해 왔는지, 현재 어떤 포지션을 갖고 있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주주라고 해서 꼭 그 기업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한국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궁금하다면 반드시 읽어보길 바란다.

 

반도체주 주주들

개인적으로 나의 미국주식 포트폴리오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엔비디아이다. 그래서 엔비디아의 이야기가 많이 나올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그 비중은 작은 편이었다. 아무튼, 엔비디아 말고도 AMD와 ARM, 삼성전자를 가지고 있는데도 반도체 지식은 아주 얕은 편이었다. 이 책은 얕은 지식을 빠르게 채워줄 수 있는 무적의 비기이다. 정말 알차다. 더구나 미국주식에 관심이 있거나 투자를 하고 있는 투자자라면 알만한 기업들이 정말로 많이 등장한다.

반도체의 역사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함께 하고, 인텔이라는 회사를 낳았으며, 대만의 TSMC와 한국의 삼성, 일본에선 소니와 도시바 등 여러 낯익은 회사를 등장시켰다. 마치 토니스타크가 아이언맨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보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이 책이 아니었더라면 네덜란드의 ASML이 왜 독점적인 위치에 있는지, 그 시작이 필립스였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웠을 것 같다. 신문에 자주 나오는 이재용의 네덜란드 방문이 왜 필요한지, 어떤 장비를 갖추고 있는지 지레짐작만 했을 것 같다,

 

마치며

반도체와 관련한 책은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사실 다른 책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지만, 이 책은 투자자에게, 혹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기간산업이기도 한 반도체 산업을 이해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가진 모든 이에게 폭넓고 깊은 지식을 전달해 주는 보물 같은 책이다. (놀랍다. 책 리뷰를 하면서 보물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다니.) 그만큼 전달력이 좋고, 작가의 말뿐 아니라 옮긴이의 생각까지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책이다.

최근 그 어느때보다도 전문가가 쓴 책들을 읽게 되어 기분이 좋다. 칩워 이전에 읽은 책은 차현진 작가의 숫자 없는 경제학과 금융 오디세이였다. 우연히 세 권이 모두 각기 금융의 역사와 반도체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일종의 역사서에 가까운데, 시계열로 여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나 이 중에서도 미국의 역사가 자주 등장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도 연대별로 사건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조금씩 똑똑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다.

좀 뜬금없지만 숫자 없는 경제학과 금융 오디세이의 작가 차현진은 한국은행에서 25년을 근무한 한은맨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금융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 높아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고수가 썼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가끔 찾아오는데, 아주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낸 지점을 발견했을 때가 그렇다. 대체로 그런 내용들을 읽은 후 내가 다시 설명하려면 말을 잇지 못할 때가 있는데, 이러한 모먼트에 작가의 내공에 대해 경탄하게 되곤 한다. 처음 금융 오디세이를 읽고 그 작가가 쓴 저서를 찾게 되었는데, 칩워를 읽다 보니 든 생각도 그렇다. 크리스 밀러라는 이 젊은 천재가 쓴 책을 읽고 있자니, 앞으로 어떤 책을 쓰든 장바구니에 담고 있을 내가 그려진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독서를 해서 기분이 좋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게 된다면 나와 함께 같은 마음을 느껴보길 권하고 싶다.

 

반응형